라이프

첫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이별했기 때문이다

오쥬비 2023. 4. 2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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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 만남과 이별 / 

1990년 그 해의 4월은 유난히도 따뜻하고 포근한 봄이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너는 내게 묻지만 대답하기는 힘들어 너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면 너는 어떤 표정 지을까...'

비스듬히 열린 학원 강의실 창밖으로 조금 멀찌감치에 있는 작은 레코드 가게에서 '사랑일뿐이야'로 갓 데뷔한

김민우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노랫가사는 그 해 따스한 봄날의 싱그러움에 촉촉한 분위기를 더했고,

힘들고 거친 세상에 이제 막 발을 내 딛는 사회 초년생인 젊은 청춘 남녀에게는 속삭이듯 따뜻하고 잔잔한 위로가 되었다. 

천성적으로 내성적인 성격때문인지 항상 강의실 맨 뒤쪽 자리만 차지했던 나는

그 날도 일찌감치 수업준비를 마치고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주경야학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이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주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강의실 문이 열릴때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힐끗힐끗 쳐다보곤 했다.  

가슴 짠하게 울려퍼지는 멜로디에 심취해 고인 턱이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순간

한 두 명의 여학생이 재잘거리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는 틈 사이로 주영은 '사랑일뿐이야♪∽' 희미하게 들려오는 멜로디와 함께 사뿐사뿐 다가온다.


양 어깨를 사이로 머리에서 등으로 흘러 내린 검고 긴 생머리는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듯 촉촉하게 축 늘어진 듯 했으나

주영이 발길을 옮길때마다 찰랑찰랑 흩어지면 얼굴을 살짝돌려 한손으로 머리를 감싸 제자리로 돌려 놓는 모습은

아직도 내 가슴 깊숙한 한편에 자리잡아 느린화면이 되어 몽글몽글 옛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그녀의 그때 그 모습은 그 보다 몇 년 뒤에 있을 '파랑색의 음료 포카리스웨트 광고에서 우리나라 톱 여배우 손예진'이

'♪♪♬ 라라랄라 라라라' 음악소리와 함께 속삭이며 시간을 거슬러 내 앞에 사뿐히 와 있는 듯 지금까지도 어렴풋이 떠올려지곤 한다. 

주영은  검은 색 티와 청바지를 좋아하는 듯 즐겨 입었으며, 그럴 때면 항상 두 서너권의 책을 한 팔로 돌려 잡아 가슴에 안고 다녔다. 

그녀는 엷은 금색을 한 동그란 안경이 잘 어울렸다. 

안경속으로 보이는 눈매는 처음 시작은 가느다랗게 보이나 안경테에 가려 살짝 보이는 눈 꼬리는 살짝 부어오른 듯 도톰한 것이 매력이었다.

살짝 웃을 때면 그 도톰한 눈매 사이로 보일락말락한 눈동자 위에 맺히는 갸날픈 눈웃음은 누구를 위한 선물일까 무척이나 가슴 설레게 했다.
 
우리는 한적한 커피숍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고, 산들산들 봄바람 살랑대는 강변 둔치 벤치에 앉아

느즈막하게 떠오른 달님을 같이 바라 보곤 했으며, 손을 잡은 채 밤길을 걸으며 속삭이기도 했다. 



그 때 할 수 있었던 내 생활의 전부는 그녀의 모습만으로 가득해 있었다. 

책을 볼때나 일할 때는 한 쪽 머리맡은 항상 그녀의 공간이었으며 심지어 밥먹을 때는 물그릇과 국그릇에는 그녀의 얼굴로 가득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지난 내 영혼과 육신을 활기차고 건강하게 가꾸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게 도움을 주기 시작한 소중한 때 였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하고 신비롭기까지 했던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 시대의 애달픈 청춘영화처럼 별안간 이별을 고하며 청춘의 쓰디쓴 고통과 애틋하고 짙은 사랑의 그림자만을 내게 드리운 채 한 장의 사진만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그 후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많은 세월을 함께 해야만 했다. 
 
♡ 재회

 
주영이 홀연히 떠나버린 지 10여 년이 흘렀을 때였을까, 같이 알고 지내던 그녀의 지인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 분의 도움으로 그녀가 살고 있는 곳과 연락처를 알수 있었다. 

경기도 안양에서 동생과 같이 지내는 것 같았다며 연락처를 함께 알려주었다.

단지 연락처를 알았다는 이유만으로 주영이 내 마음에서 싹트기 시작했을 무렵의 그 때처럼,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토록 설레는 가슴을 가눌 수 없었다. 
 
주영을 다시 만날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했고 나를 가엽이 여긴 전지전능하신 분이

따뜻하고 온화한 보살핌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신 듯한 벅찬 기쁨은 며칠동안이나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가슴에서 소용돌이 쳤다. 

다시 만나게 되면 무슨말을 어떻게 해야할 지, 그것이 주영에게 알수 없는 상처로 남을지 걱정도 앞섰던 마음에 몇날 며칠 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지난 10여년 간 그녀를 가슴에 안고 살아온 나날을 생각하면, 그런 두려움과 걱정보다는 애정어린 기다림과 그림움이 더 크게 자리 잡았다.

그 기다림과 그리움은, 어느 한적한 길 전화박스 안에서 고민하는 나에게 수화기를 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여보세요" "김주영씨 계신가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녀의 동생이라고 했다.  주영은 회사에 갔고 저녁에나 돌아온대고 했다.

나는 그녀와 어떤 사이며 꼭 한번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얘기하며 오늘 안양역 플랫폼에서 6시에 기다리겠노라고 동생에게 정중하게 부탁하며 전화를 끊었다.

언니가 일하는 곳이 안양역 근처라고 동생이 일러 주었다. 
 
공중전화 수화기를 올려놓고 이 선택이 오른 것일까, 바보짓일까 한동안 생각했다. 

수줍음 많던 시골 촌놈이었던 나는 어찌 그런 용기을 내었을까...  조금 일찍 서둘러 청량리행 기차를 탔다. 

열차 창가에 앉아 걱정반 기대반 두근거림으로 그녀와의 옛 생각에 젖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두시간 여를 달려간 청량리에서 안양역행 지하철을 옮겨탔다. 안양역에 도착하여 설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1시간을 조금 넘게 기다렸다. 

전철은 꽤나 자주 오갔으며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동안 나는 꼼짝도 안하고 둥근 벤치에 둘러 쌓인 역 한 가운데 자리잡은 기둥 옆에 서 있었다.
 
어느덧 날은 어둑어둑 해지고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보니 퇴근 시간이 가까워 진 듯했다.  6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한 여성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눈을 돌려 보았다.  알맞은 외소한 몸에 이쁜 얼굴의 젊은 여자이다.
 
" 혹시, 정진우님 아니신가요?" 나에게 말을 걸었다.

" 아, 예. 그런데요, 누구신가요?"
겸연쩍게 대답은 했지만 곧 그녀의 동생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예, 주영 언니의 동생이예요, 언니가 지금 회사일로 바빠서 조금 늦는다고 여기서 조금만 더 기다리시든지, 아니면 커피숍이라도 가서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이 말을 전하러 온 동생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들이켰다.  만나지 않겠다고 동생을 보낸 게 아니라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에 또 고마워 했다. 

 " 예,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나눈 뒤 동생은 바쁜 듯 걸음을 재촉하여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나 그녀를 다시 만나기만을 오매불망하던 시간은 이제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초조한 기다림 속에 잠시 후 누군가 베이지색 롱코트를 입고 또박또박 소리를 내며 다가와 멈췄다.  나는 그녀를 알아보는 데는 몇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동그란 금색의 안경, 긴 생머리, 도톰한 눈매 10년의 세월은 그녀를 비켜나간 양 그 때의 그모습 그대로였다. 

감격의 포옹이라도 나눴어야 했으련만 우리는, 아니 나는 바보같이 서먹서먹하고 쑥스러운 인사만을 건넨게 고작어었다.

"오랜만이야, 하나도 안변했네"
 
"잘지냈어요? 오랜만이에요, 근처 어디로 갈까요?"

우리는 안양역 대합실 한쪽에 자리잡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차를 주문하고 살아온 얘기를 나누었다.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동안 생각에 잠기며 말을 아끼던 주영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전 오빠를 떠날 수 밖에 없었어요, 그 때도 애기한 것처럼 저.. 때문에 오빠한테 피해가 갈 수 있어요,

그렇게 그런 일이 있으면 안돼요, 죄송해요." "......" "정말 이해해 주세요."

10년 전에 '우리시장' 2층 커피숍에서 지금과 같은 얘기를 전하며 축쳐진 나를 뒤로하고 떠난 그녀였다.

그 때는 헤어져야 한다는 그 암울함 때문에 그녀의 말은 단지 핑계라며 큰 의미를 담지 않았었다.

그런 그녀가 오늘 또 다시 내게 털어놓은 얘기는 단호하고 진심이 담겨있는 말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몇번이고 되물었고,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시간이 흘러 시계는 벌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녀와 영영 헤어져야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잘 지내세요, 오빠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분 만나실거예요. 정말이에요, 꼭 그렇게 되기를 빌께요."
그렇게 그녀와의 해후는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 그리고, 마지막 이별


그녀는 청량리행 티켓을 끊어 내 손에 건네 주며 한손을 내밀었다.  다시 보지 못할 작별의 인사를 앞두고 있던 순간은 짧았지만 영원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청량리행은 기차를 타기 위해 육교를 지나 건너편 플랫폼으로 가야했다. 

그녀를 남겨놓고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힘겹게 이끌고 육교를 올라 건너편으로 향했다. 

주영은 움직이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응시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그녀에게 달려가야 하는건가?' '아니야, 그녀와 나를 위해 숙명을 받아들여야 해'

마음을 고쳐먹고 건너편 플랫폼으로 가서 두개의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했다. 

"따르르릉"
반대편에서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빠른 속도로 기차는 달려와 우리의 영원한 이별을 알리는 듯이 빠르게 선을 그으며

그녀와 나 사이를 매몰차게 갈라 놓았다. 기차가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아직도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까? 그 몇초의 시간이 그렇게 오래 느껴졌는지 야속하기만 했다.

그토록 긴 장벽처럼 느껴졌던 기차는 짧은 기적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반대편 플랫폼엔 흐릿한 연기만이 그녀의 자리를 뒤덮고 있었다.  그렇게 주영은 그 야속한 기차를 따라 이름 모를 곳으로 바람과 함게 사라졌다.

그날이 주영과의 마지막 만남이었고 아직까지 내 마음속에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는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그녀와 처음에 어떻게 만났는지는 '클래식한 이야기에 https://eco-cafe.tistory.com/33 

 

클래식, 촌스러운 이야기

내 어린시절 어머니는 TV 드라마를 보시다 슬픈 장면이 나오면 항상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 뒤에서 '뭐 때문에 또 우셔요?, 그게 그렇게 슬퍼요?' 그런 어머니를 놀리듯

eco-cafe.co.kr

포스팅 했듯이 너무나 촌스러운 이야기다.  너무나 촌스러운 이야기도 누군가에게는 고귀하고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으니 다행이다.
 
그대를 만나기 위해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그대는 나의 온몸으로 부딪혀
느끼는 사랑일 뿐이야 

 

첫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별을 했기 때문이다. _쓰비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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