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촌스러운 이야기
내 어린시절 어머니는 TV 드라마를 보시다 슬픈 장면이 나오면 항상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 뒤에서 '뭐 때문에 또 우셔요?, 그게 그렇게 슬퍼요?' 그런 어머니를 놀리듯이 물어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
내 나이 50 중반 요즘엔 어릴때 보았던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감정조절이 어렵다. 멜로 영화는 물론이요 무지막지하고 폭력적인 영화에도 눈물이 난다.
옛날에 내가 어머니를 앞에 두고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이 그런 내 뒤에서 놀릴까 몰래 눈물을 감추려 애쓰기도 한다.
세련되게 표현해서 나이가 드니 좀 센티해졌다고나 해야되나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센티하던 모습을 요즘은 찾아볼 수 없다.
어머니에게서 손끝으로 살짝 건들기만해도 톡 터져 흘러내리는 아침 이슬처럼 아름답고 풋풋하며 풍부했던 감성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너무 속상하고 아쉽다.
지나온 삶의 흔적뒤로 묻어둔 것인지, 아니면 애써 숨겨놓으셨는지 옛날 젊은 시절 어머니의 모습이 그립다.
며칠 전 집에 혼자 있게 되는 기회를 갖는 바람에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었던 영화 한편이 생각났다.
제작된지 오래된 영화라서 그런지 무료 콘텐츠에 들어 있어 다행이었다. 영화관 분위기를 내기 위해 어둡게 살짝 커튼을 치고 과자 한봉지를 집어들고 아주 편한 자세로 소파에 누웠다.
영화 시작이다. 큰일이다. 영화 시작하자 마자 두 눈에 고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럴 수는 없다.
아무리 혼자 있다고 해도 영화 이제 시작하려고 타이틀 나오는데 벌써부터 무너지다니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올방개(가부좌_강원 방언)로 바로 앉아 스크린을 쏘아보았다.
영화 시작부분 OST 피아노 선율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두눈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영화 도입부터 나를 압도했던 그 음악은 '캐논변주곡'이었다.
전개 될 영화의 내용은 잔잔하면서 애틋하고 푸풋한 연인들의 오래된 촌스러운 연애 이야기다.
주인공이 엄마에게 전달된 옛날 연애 편지들을 읽으며 '촌스러워, 좋아 클래식하다고 해두지 뭐' 이렇게 속삭이며 시작되는 영화 "클래식"이다. 쓴 스틱 커피를 타 소파에 다시 자리잡았다.
영화는 쇠똥구리, 나룻배, 귀신의집, 소나기, 연애편지, 우산, 반딧불이, 통나무다리 이런 정겹고 소박한 것들을 소재로 하여 주인공은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인연이 맺어지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누구나 이런 단어들과 얽힌 추억을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중학교 2학년 무더운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장마철이었지만 비는 오지 않고 햇볕이 먹구름 사이로 반짝이다 사라지곤 하는 변덕스러운 날이다. 방과 후 집으로 가기 위해 친구들과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떠들고 있다.
몇몇이 짝을 지어 모여 무슨 얘기들을 하는지 시끄럽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그 날에 대화했던 내용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좀 우수꽝스럽고 창피하다. "수철아,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될 것 같니, 우리는 몇살까지 살 수 있을까?" 뭐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연세가 좀 들어보이고 힘들어 하시는 표정의 얼굴로 정류장을 지나치는 어르신을 보며 문득 생각이 나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중학교 2학년인 내가 친구와 대화할 내용은 아닌것 같은데, 정말 유치하기 짝이없다. 친구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모른다 아마 속으로 '미친 놈' 하며 비웃엇을 게다.
한참을 기다리니 집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방과 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학생들로 붐비지는 않았지만 편안히 앉아서 갈 형편은 아니었다.
단지 장마철이라 들고 있던 우산이 좀 거추장스러웠다. 운전기사 뒷쪽 좌석을 받친 기둥에 기대어 섰다.
몇 정거장 지나자 사람들이 많이 내려 버스 안이 정리가 되니 파란색의 유니폼을 입은 버스 안내양 누나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에 가려 승하차를 알려주며 외치는 낭랑한 목소리만 들렸는데 바로 옆에 보이는 안내양 누나의 모습은 너무 예쁘고 아름다웠다.
부끄러워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버스가 흔들일때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동그란 모자를 쓴 갸날픈 얼굴과 길게 딴 머리를 감싸고 있는 가슴을 살짝살짝 볼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콩닥콩닥 설렜다.
차창 밖으로 비가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목적지인 문화극장 도착을 알리는 누나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나는 사람들에 묻혀 버스밖으로 밀려 내려졌다.
사람들을 토해내고 버스가 바삐 출발한 뒤 집으로 향하던 나는 우산을 차에 두고 내린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일부러 우산을 차에 두고 내렸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누나에 정신이 팔려 깜빡 잊었을 것이 분명하다.
다음날 학업이 끝나고 어제와 같은 시간 같은 정류장에서 어제 그 버스를 기다렸다. 몇 대의 버스가 지나가고 마침내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다.
어제 우산을 두고 버스에서 내린 후 버스 뒤 꽁무니를 보며 차 번호를 보았던 어렴풋한 기억은 어제 그 버스임을 알기에 충분했다.
버스에 올랐다. 운이 좋았던지 어제 가슴 설레며 지켜보았던 그 누나가 보였다.
쑥스러움이 유난히 많았던 나는 이성을 알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제가 어제 여기에 우산을 두고 내렸는데 혹시 못 보셨나요?" 분명 이렇게 말을 했는데, 나는 나에게도 내가 말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개미소리였다.
너무 창피하고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거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인가,
정말 바보 멍충이(멍청이 방언) 아닌가. 너무 소심한데다 목소리까지 작아 다른 사람이 듣지도 못했을 텐데 나만 혼자 한심하게 쪽팔려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누나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아 그 거, 혹시 이거니?' 하며 허술하고 낡은 우산을 하나 앞쪽 의자 밑에서 집어 들더니 내게 내밀려 말을 건넸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나도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는 한심하고 초라한 목소리였는데 누나가 그것을 알아들었나, 너무 기뻤다.
하늘이 도와 준 것 같은 기분 그 때의 그 누나 모습은 어제보다 더 예쁘고 고와보였다.
"다음엔 잊어버리지 말고 잘 가지고 다녀, 어제는 비가 내렸는데 어째서 우산을 두고 내렸어" 나는 또 죽어가는 개미 목소리로
"예, 그게.. 고맙습ㄴ...ㄷ..ㅏ" 이것마저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 이후로 버스안내양 누나를 보지 못했다.
'저, 누나를 다시 보려고 일부러 우산을 놓고 내렸어요."
이런 말이 하고 싶었는데 입속으로 우물우물 거리기만 했다.
영화 중반에 주희가 학교 음악 발표회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8번 비창'을 연주한다. 클래식 음악을 접해 보지 않은 나는 '비창'이 영화 도입부에서 듣자마자 나를 슬프게 했던 '캐논변주곡'과 같은 것인지 알았다.
비오는 날 교내에 있는 나무 그늘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지혜에게 상민도 비를 피해 지혜와 마주치게 되고 비를 맞으며 도서관으로 가겠다는 지혜를 상민은 외투를 벗어 옷 우산을 하여 같이 뛰어가자며 데려다 준다.
이 때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너에게 난 나에게 넌(자전거 탄 풍경)' OST는 가슴뭉클함을 더해 눈물샘을 마구 자극했다. 이 장면에서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눈물이 앞을 가려 영화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날 상민이 매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비오는 창밖을 바라보다 지혜가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 우산을 매점 누나에게 가지라고 말하며 뛰어 나갔다는 것을 매점에서 언니에게 들은 지혜는 기뻐하며 상민의 우산을 들고 빗속을 뛰며 상민에게로 향한다.
이 장면에 또다시 등장하는 OST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나는 또다시 눈물 한바가지를 쏟아냈다.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는 이유다.
상민 '우산 있는데 왜 비를 맞고 다녀' 지혜 '우산있는데 비맞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저하나 뿐인가요?'
정확한 대사는 아닌 것 같지만 이 영화의 명대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클래식'은 2003년도에 발표되었다.
이 보다 10년 전인가 나는 어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 노심초사한 적이 있다.
어떻게 해야 그녀가 나를 바라보게 할 수 있을까 속으로만 애태우던 날들이 많았다.
'말을 걸어볼까?'
아니야 행여나 섣부른 짓은 어린 시절 "버스안내양 누나"처럼 내 마음을 알고 말을 건네주지 않으면 그처럼 망신은 없을꺼야,
그녀는 같은 학원을 다녔는데 학원을 마치면 시내버스를 타곤 했다. 나는 며칠을 고민 고심을 거듭한 끝에 내 마음을 전달하기로 결심했다.
그날 학원을 마치고 나는 그녀보다 버스정류장에 먼저 가서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무슨일이세요?
" 다행히도 그녀가 먼저 인사를 한다. "아, 예. 어디 좀 가느라고요" 유치하지만 우연인 척 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날 내 계획은 같은 버스를 타고 얼마 가다 난 여기서 내려요 잘가요, 이런 거였는데 버스가 좀 늦어지는 바람에 더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비오는 날 버스안내양 누나에게 멀을 건넬 때보다 정확하고 또박또박 신중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저, 아직 집에갈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차나 한 잔하고 갈까요, 괜찮아요?" 정적이 흘렀고 불안했다.
싫다고 하면 어쩌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럴까요?"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너무 기뻤다. 최고의 날 아니겠는가.
피아노 발표를 끝낸 주희에게 꽃다발을 어렵게 전해주고 돌아서 기쁨의 발차기를 하며 좋아하는 준하, 상민의 마음을 알고 비를 맞으며 상민에게 뛰어가다 군인들 함성에 손경례로 답하는 지혜처럼 나도 영화 속의 한장면이었다.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단지 이 OST만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며 '만나고 싶어 일부러 먼저 와 기다렸노라' 밝힌 기억이 난다.
그 후로 그녀와 어떻게 되었는지는 지난번 '첫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이별했기 때문이다' 에 포스팅했다.
영화는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하면 영화의 소임을 다한 것이 아닌가, "클래식" 장면 하나하나 스토리 하나하나에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다니 혼자 있지만 좀 부끄럽기까지 했다.
나이가 들면 감정을 다독이는 힘이 더 강해져야 할 것만 같은데 나의 이런 과한 센티함이 비정상적인지 의심스럽다.
"클래식"을 보고 있자니 영화속 이야기처럼 나의 스토리도 영화의 한장면같이 잠시 동화되었다.
지혜가 엄마의 연예편지를 읽어내려가며 촌스럽다고 얘기했듯 '너무나 촌스러운 비밀아닌 비밀이었지만' 그래도 너그럽게 영화속 지혜처럼 '클래식하다'고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