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람
우리 둘째 아이의 이름은 이은(伊听)이 그래서 최이은이다.
작명소에서 대가를 지불하고 지은 이름 치고는 옛날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우리들에게 대충 붙여준 이름보다는 훨씬 세련 된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
본인도 싫은 것 같아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그런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는 이은이라 부르는 것보다 더 많이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별명이 있는데 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지만 그 아이를 부를 때 '오롱아''오롱이'라고 부른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 내년 2024년이면 벌써 어엿한 중학생이 되는데 키는 또래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좀 큰 편에 속한다.
6학년 같은 반에서도 손가락 안에 들 정도라고 하니 키에 관한 한 그다지 내 세울 게 없는 부모를 닮지 않음을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그 아이가 저학년 2-3학년일 때에는 '아픈 데 없고 건강하게 무럭무럭 키 커라'를 입에 달고 살았다.
이것은 어느 부모나 다 같은 마음일게 분명하다. 부모들은 늘 그렇게 아이들이 병치레하지 않고 학교 잘가고 잘 먹고 잘 크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 나는 오롱이가 더이상 크지 않기를 아빠로서 바라고 있다.
물론 오롱 엄마와 6살 많은 언니 윤지가 들으면 둘이 합작하여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나를 몰아세우기 일쑤지만 말이다.
같은 편인 두 사람은 모르겠지만 남자인 내가 보기에는 굳이 남자들이라고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아주 적당하고 보기좋은 키라고 생각되니 말이다. 하여튼 내 '바람'이다.
한 때는 키가 커 주었으면 '바람'이었고 지금은 그만 커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롱이'라는 별명은 그 애 언니 윤지가 엄마 뱃속에 아기가 있다는 게 신기해서 인지 여차저차 해서 엄마 아빠 있는 데서 '오롱이'라 부르자고 해
그 때부터 이은이란 이름 짓기 전부터 익숙해서인지 '오롱이'로 불리어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그러니까 6살 더 많은 지 언니가 지어순 태명이 '오롱이'인 것이다.
그 후로 우리 가족 모두는 '오롱이'가 잘 태어나서 잘 자라기만을 희망하는 '바람'이었다.
우리는 모두 원하는 것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진행되기를 바란다. 키가 크기를 바라고, 이제 그만 크기를 바라고 건강하게 잘 태어나기를 바라며 잘 자라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두 딸 아이들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일만은 겪지 않고 무사히 잘 커서 자기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대단하고 크지는 않더라도 무언가 창의적이고 특별한 일을 애들이 원했으면 하는 소박하지만 어려울 수 있는 보통의 '바람'을 가지고 있다.
올해 고3 수능생이라 밤 늦게까지 공부에 메달리고 있는 첫째 윤지가 피해갈 수 없는 어려운 과정을 잘 견뎌주기를 바라는 '바람'은 특별하다.
이 모두가 이루어지기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모든 가정의 부모가 희망하는 '바람'인 것처럼 말이다.
2. 친구의 바람
18개 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집에서 나름대로 힘들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며 집에서 쉬는 기간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부터 일찌감치 대학 진학을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느 동기들처럼 대학에 복학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던 터라 친구들보다 쉬는 시간이 좀 길었고 여유로웠다.
다행히도 군 복무 시절 나의 성향과 같다고 생각되는 동료를 만나게 되어 어렵고 힘든 군 생활을 그나마 잘 보낼 수 있게 했던 친구와 만남을 유지할 수 있어서
젊은 시절 소중했지만 무료할 수 있었던 시간을 그 친구와 잘 보냈던 것, 그 당시 그 친구를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냈던 것은
나에게 적지 않은 행운이었으며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혹시라도 나중에 누군가 실수로 내 블로그를 방문하고 그리고 또 한번의 실수로 이 글을 지루하게 읽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에 친구를 소개하기 위한 서론이 좀 길어짐을 이해하기 바란다.
그 친구 이름은 '호규' 미스터 '손'이다. 나는 호규와 같이 있게 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가 좋아할 만한 친구지만 나와는 좀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그에게 있다는 것을 느꼈다.
친구는 다방면에서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 악기를 잘 다룰 줄 알았고 운동실력은 또래 최상이었던 기억이 난다.
탁구, 축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고 기타 연주 실력 역시 수준급이었다.
한번은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그당시 민중 저항 대중가요로 인기 있었던 '아침이슬' 노래를 기타 연주와 함께 들려주는데
그 모습이 내게는 너무 부러워 보였다. 호규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노래 실력은 화려한 손놀림의 기타 연주를 조금 밑 돌았던 것 같았다.
군대에서 체력 단련 시간에 축구 시합을 하면 여지없이 '호규'는 선발되었고 당연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를 해야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보아온 축구 선수 누구와도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공을 한 번 잡으면 잘 뺐기지 않고 상대편인 선임들 몇 사람을 제칠 수 있는 보기드문 드리블러였다.
예능이나 운동 방면은 물론이거니와 그 외 아무 것도 할 줄 몰랐던 나와 절대 비교 되는 이런 다재다능한 친구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 당시에는 좀 부담스럽다고 느꼈을 정도이다. 하여튼 훌륭한 이 친구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고 이런 날들이 계속되는 것이
그 당시 나의 작은 '바람'이었지만 먹고 살아가야 하는 일이 중요했던 청춘 시절 각기 다른 직업 선택으로 인해 친구는 다른 고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 친구는 도예가의 길을 걸었다.
본인은 꿈이 아니라 어느 기회에 주어진 먹고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의 재능이나 성향으로 보아 도자기를 빚는 모습을 떠올리면 아주 잘 어울릴 그림이 아니었을까 생각됐다.
그로부터 몇년 후 '호규'를 만나 옛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식 준비를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때였다.
그 때 '호규'에게 들었던 얘기는 나한테는 또 한 번 그 친구는 나와 다른 사람이며 존경스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결혼식 주례를 서주실 분으로 모시기 위해 *박경리 작가를 찾아 가서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박경리 작가는 현재 박경리문학공원 자리인 원주 단구동에 정착하여 창작활동 뿐만 아니라
연세대캠퍼스에서 소설관련 강의도 하셨고 객원교수로도 임용되어 활동하셨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인터넷의 도움으로 알게 되었다.
어렵게 만나서 정중히 부탁을 드렸는데 박경리 선생은 친절하게 거절하셨다고 친구는 안타까워 하면서 나에게 얘기했는데
그에 대한 내 반응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낮부끄럽기까지한 얘기지만 조심스럽게 고백하려고 한다.
'박경리가 남자야?' '.........' 꾹다는 입술로 호규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유명한 작가라는 것은 알았지만 친구가 그 분에게 주례를 부탁한 것이라면 남자일텐데 헷갈려 물었을게다.
물론 학교 공부도 열심히 안한 탓도 있지만 문학 분야는 더욱 문외한이었으니 그때의 그 순박했던 무지함에 대해 이제 와 나름대로 그 때의 내 자신에게 용서를 해주고 싶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학 작가에게 주례사를 부탁하는 친구는 정말 대단해 보였다.
친구의 '바람'대로 박경리 선생이 부탁을 허락하셨다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가정과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가슴 벅차게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가겠다는 친구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정중히 사양하신 선생의 뜻을 친구는 살아가면서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또한 유명 작가로서 선생의 어려웠던 선택을 나는 이해하며 존경해 마지 않는다.
친구는 존경하는 박경리 선생께서 주례를 맡아 주시면 가문의 영광이며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리란 기대를 품은 '바람'이었고,
선생께서는 정중한 사양이 친구의 앞날에 더 보탬이 될 것이란 '바람'으로 여기신 또 하나의 소중한 가르침이었을 것이라 믿는다.
친구는 결혼식 주례를 고등학교 은사님에게 부탁하였고 지금은 경기도 이천에서 본인이 힘들고 어렵게 도전하여 성공한 도자기 공예가로써
"도공이야기" 공방을 운영하며 두 아들의 아빠로 좋아하는 축구도 즐기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 희망 -
오늘 하루가 곤한 허리가
쉽게 잠을 청하지 못함도
큰 뜻이거니
땀이 되어 흘렸던 눈물은 나의 희망
공방의 낡은 기계 소리처럼
거친 숨소리가
돌아와 누운 밤
울거니 웃거니 하지 않아도
가을 잎의 모가지가
부러질 때면
나는 이미 꽃을 피우고
눈부신 열매를 맺은 후일일 텐데
[별을 담은 그릇, 나를 닮은 그리움] 중에서
도공이야기.. 손호규 지음
3. 나의바람
그로 부터 20여 년이 지났고 나는 공무원으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박경리 선생을 다시 한번 찾아갈 기회가 있었다.
2014년도였으니 선생이 타계하신지 6여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직장일로 선생이 집필 활동을 하셨던 곳을 찾아가려니 가슴이 설레며 조금은 긴장한 가운데 동료와 함께 원주 흥업면에 위치한 '토지문화관'을 찾았다.
선생의 따님이자 당시 '토지문화관' 이사장을 지내셨던 '김영주' 이사장께서 차를 내주시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업무 내용에 대한 부탁을 드리자 김 이사장께서는 '훌륭한 생각이시네요,
이런 분들이 공무를 보시니 너무 좋네요' '좋은 생각입니다' 하시며 칭찬해 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시에서 매달 2회 발간되었던 시정소식지 타이틀 네글자를 박경리 선생의 대표작 '토지' 작품 중에
선생께서 직접 원고지에 쓰신 손글씨를 따서 타이틀로 사용하자는 소식지 담당자인 나와 동료의 제안이었으며,
다시 언급하지만 박경리 선생의 딸이자 토지문화관 이사장께서도 흔쾌히 허락해 주신 사항이라 담당 과장에게 보고하고 결제만 득하면 되는 일이었다.
과장은 이 건으로 회의를 하자며 계장들과 직원 몇몇을 테이블로 불러 모으고 각자 의견을 물었다.
결론은 우리들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야말로 묵살되었다.
그 회의에서 있었던 얘기들을 떠올리면 부아가 나고 화가 끓어 오른다.
그 중에 제일 어처구니 없는 의견을 낸 '×'이 있는데 그 못쓸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이거 내 가 써도 이것 보다 낫겠네' 이렇게 비꼬듯 비아냥거렸으 또 다른 '×'는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렇게 폄훼하고 무지하게 무시해 버렸다.
당시 회의에서 나온 의견은 여기서 다 거론할 수 없다.생각하면 할 수록 그'×.×'들이 미워지기 때문에 가슴속에 묻어 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 인간들을 계속 미워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람은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이기적인 한심한 동물이란 것을 다시 한번 느껴 이런 사람들과
한 집단에서 생활하는 것이 신물이 날 정도여서 우리는 설득할 생각도 없이 덮어 버렸다.
그 때 마음을 가다듬고 설득 못하고 관철시키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까운 오점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들이 자기 글씨보다 못하다는 선생의 작품인 '토지' 원고에 담긴 글씨를 소개한다.
나는 이보다 정겹고 한이서린 듯 하면서 아름답기까지 한 글씨를 본적이 없다.
이 이야기를 친구 '호규'가 알았다면 무어라 말했을까, 이랬을 것이다.
'박경리 선생도 가만히 있는데 왜 너가 서운해 하고 그러냐, 훌륭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 됐다면 너의 가슴속에 있는 것만도 위안이 되는 일 아닌가 친구!.'
나와 동료를 반갑게 맞아 따뜻한 차를 내 주시며 칭찬해 주신 토지문화관 김영주 이사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싶다.
나와 동료는 '행복원주'가 보다 많은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소식지로써 다가갈 수 있게 하기 위한 '바람'으로 추진한 일이였고 그 '바람'은 거기서 머무르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4. 불어오는 바람
우리가 무언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희망하는 '바람'은 이렇듯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움직인다는 의미의 말이다.
'키가 크기를 바라며, 때로는 키가 더이상 크지 않기를 바라고''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며,
커서는 자기가 원하고 희망하는 일을 하기를 바라고"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좋은 친구와 함께 하기를 바라고"
"뜻 있는 일처리로 시민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그로인해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모두 다 '바람'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이는 그 무언가 이다.
무덥고 찌는 듯한 한 여름 공기가 한 곳에 머물러 이동하지 않는 다면 '바람'이 없어 숨이 턱 막힌다.
가슴 답답하고 힘든 일 겪으면 우리는 '바람'쐬러 나간다고 하는 것도 시원한 들판이나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려는 것이고 아니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것도 '바람'쐬러 떠나는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가 '바람'을 핀다는 의미도 오래 같이 살아온 부부 생활에 실증이 나 집 밖으로 나가 다른 이성과 만나는 것이 아닌가.
문밖에서, 집밖에서, 야외 들판에서, 산에서 불어오는 형태없는 공기 그 무언가를 왜 '바람'이라 부르는가,
사람은 모든 것이 어떻게 되고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희망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우리 빰에 스치며 다가오기를 바라고,
지나가기를 바라며, 때로는 멈추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것을 '바람'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네이버 지식백과] 박경리 [朴景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26년 12월 2일(음력 10월 28일) 경상남도 충무시(지금의 통영)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박금이.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김행도 씨와 결혼해서 이듬해 딸 김영주를 낳았다.
1950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가정과를 졸업한 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6.25 전쟁통에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가 죽고, 연이어 세 살 난 아들을 잃게 된다.
이후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부터 한국현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대하소설 「토지」연재를 시작하여, 1994년 8월 집필 26년 만에 「토지」전체를 탈고하였다.
1980년 지금의 박경리문학공원 자리인 원주시 단구동 742번지에 정착하여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1992년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소설창작론을 강의하였고, 1995년 같은 대학교 객원교수로 임용되었다.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창립하고, 이어서 1999년 토지문화관을 개관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토지문화관은 문학인들에게 창작공간을 제공하고, 다양한 학술 문화 행사를 기획, 개최해 왔다. 2008년 5월 5일 폐암으로 타계하여 고향인 통영시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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