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작

만남과 이별, 그리고 다시...

by 코드윈 2026. 4. 16.

♡ 만남과 이별, 그리고 다시…

1990년, 그해의 4월은 유난히도 따뜻하고 포근한 봄이었다.

비스듬히 열린 학원 강의실 창밖으로, 조금 떨어진 작은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던
사랑일뿐이야의 감미로운 멜로디.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 노랫가사는 그해 봄날의 싱그러움 위에 촉촉한 감정을 얹어주었고,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우리 같은 청춘들에게는
조용한 위로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늘 강의실 맨 뒷자리를 지키던 나는,
그날도 일찌감치 수업 준비를 마치고
그 노랫소리에 기대어 지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였다.
강의실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괜히 시선을 들어 올리고,
괜히 심장이 한 번씩 더 뛰었다.

그녀, 영주.


가슴을 울리는 멜로디에 잠겨
턱을 괴고 있던 손이 스르르 미끄러지던 순간,
여학생 몇 명이 웃으며 들어오는 사이로
그녀가 나타났다.

‘사랑일 뿐이야…’

희미하게 흐르는 노래와 함께,
영주는 그렇게 내 앞에 사뿐히 걸어 들어왔다.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던 검고 긴 머리는
아직 마르지 않은 듯 촉촉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한 손으로 머리를 정리하던 그 순간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느린 장면처럼 남아 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그 모습은 마치
손예진이 등장하는 청량한 광고 장면처럼
어렴풋이 떠오르곤 한다.

영주는 검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즐겨 입었고,
항상 책 두세 권을 가슴에 안고 다녔다.
엷은 금색의 동그란 안경은 그녀에게 참 잘 어울렸다.

가늘게 시작해 도톰하게 맺히는 눈매,
살짝 웃을 때 스치는 눈웃음은
누군가를 위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 눈웃음 하나에
나는 수없이 설레었다.


우리는 함께 시간을 보냈다.

조용한 커피숍에서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봄바람이 부는 강변 둔치 벤치에 앉아
느즈막히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았다.

손을 잡고 걷던 밤길,
작은 목소리로 나누던 이야기들.

그때의 내 삶은
온통 그녀로 가득 차 있었다.

책을 읽을 때도, 일을 할 때도,
심지어 밥을 먹을 때조차
내 마음 한편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내 삶이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했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영주는 어느 날,
마치 그 시절의 청춘 영화처럼
갑작스럽게 이별을 전했다.

이유는 끝내 분명히 알 수 없었고,
그녀는 사진 한 장만 남긴 채 떠나갔다.

그리고
그리움은 오랜 시간 내 곁에 남았다.


♡ 재회

그녀가 떠난 지 10년쯤 지났을까.

우연히 만난 지인을 통해
영주의 소식과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처음 그녀를 기다리던 그날처럼
설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전화를 들었다.

“백영주 씨 계신가요…”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날,
나는 안양역에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림은 길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오갔고,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그리고 6시가 조금 지난 어느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동생이었다.

“언니가 조금 늦는대요.”

그 말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오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잠시 후,
베이지색 롱코트를 입은 한 여자가
또박또박 걸어와 멈춰 섰다.

영주였다.

10년이라는 시간이
그녀만은 비켜간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그저 서먹한 인사만을 나눌 수 있었다.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우리는 지난 시간을 이야기했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전… 오빠를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10년 전과 같은 말.
하지만 이번에는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분명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마지막 이별

그녀는 청량리행 기차표를 끊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짧은 인사.
하지만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 순간.

육교를 건너
반대편 플랫폼에 서서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차가 들어왔다.

굉음을 내며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며 지나갔다.

그 몇 초가
끝없이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기차가 지나간 뒤—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연기만이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별은 아픔으로만 남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맑고 선명해져,
내 마음속 어딘가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촌스러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평범한 이야기가
가장 깊고, 가장 고귀한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그대를 만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이별을 지나왔을까.

그리고 그대는,
내 삶 속에서
온몸으로 부딪혀 느꼈던

단 하나의 사랑이었다.

반응형